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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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생성형 댓글 0건 조회 661회 작성일 23-02-04 09:27본문
예순 다섯이 되도록 많은 일을 겪었다. 세상에서 중시하는 이력을 보아도 그렇다.
초등학교는 산 너머 반월 분교를 다녔다. 분교가 있는 마을에서 텃세하는 사람들, 동네 지나오는 동안 만나는 개 때문에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어린 마음에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초등학교 삼학년부터는 진안읍에 있는 진안초등학교에 다녔다. 리에 견주면 읍은 별천지였다. 유지 자녀도 많았고, 분교 출신은 촌놈 취급을 하여 몇 달은 적응하느라 힘들었다. 내내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서 주눅이 들어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 왕복 이십 여 리를 걸어다니는 게 고역이었다.
중고등학교도 읍내에서 다녔다. 산골에서 산촌 읍내이니 지금 생각하면 손바닥 만하지만 당시에는 그곳이 세상의 전부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런대로 공부하여 고등학교를 나와 삼수했을 당시 치른 예비고사에서 최고를 기록하여 나와 부모가 기뻐한 적이 있다. 그렇게 대학에 두 번 떨어진 다음에 세 번째 전북대 사범대에 들어갔다. 가난하여 국고를 보조하는 사대가 아니면 다니기 힘들어 삼수까지 하며 대학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공직이나 육군삼사관학교에 들어가라 했지만 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고, 그게 재미있어 집안과 동생보다 내 욕심을 부리느라 대학에 갔다. 대학에 가서도 시골 출신으로 처음에는 문화 충돌을 조금 겪었다.
2사단 17연대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 사이에 알력이 있어, 소수인 전라돈 출신인 데다 바로 위가 경상도 출신 가운데서도 비뚤어진 인간이라 곤욕을 치렀다. 그가 전라도 선임에게 당한 걸 온순한 내게 푸는 듯했으나 80년대 초만 해도 그런 부조리는 참아야 했다.
대학을 나와 교사가 되었다. 이왕이면 교수가 되려고, 석사, 박사를 밟았다. 그 과정에서 학사 시절에 보지 못한 교수들의 갈등과 그 진면목을 보고 젊은 혈기에 학계를 떠났다. 공립중과 사립중에서 사표를 던지고 신분이 불안한 데다 다시 중고등학교 교사로 가는 길도 좁을뿐더러 그러기 싫어 학원을 차렸다.
학원을 운영하면서는 삼십대 후반까지 공부한 게 소용 없는 것 아닌가 하고 허탈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국어와 논술을 가르쳤는데 내가 전공한 고전문학과 직결되는 부분도 있었고, 인생 경험과 교육 경력이 쌓아 학원에서 직업 전성기를 보냈다. 실패와 성공이 엇갈린 시기다.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려 블로그, 팟캐스트를 운영해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쉰 살이 되면서 경제 활동을 최소화하고 작가로 나섰는데 그 길도 마음 먹은 대로 터지지 않았다. 환갑 이후에 운영하는 유튜브 또한 생각대로 안 되지만 신나게 방송한다. 내가 추구하는 바와 맞고 인생성형에 유리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초중고대를 거치며, 대학교 때 과 학년대표 해본 게 전부인데, 교육위원 선거에 나갔다가 참패했다. 8명 중 7위였다. 그 뒤로 정계에는 얼씬거리지 않는다. 내 경험과 지식을 유용하게 활용하려 했으나 그곳은 순진한 사람이 들어가기에 유리한 곳이 아니었다. 수업료 치르고 또 다른 경험의 학교를 나온 셈이다.
그렇게 저렇게 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돌아보니 회한도 있고, 힘쓴 데 견주어 열매가 적어 허탈한 부분도 많다. 그러나 겪고 배운 모든 게 자산이 되어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모든 경험은 쓸모가 있었고, 그 어떤 경험도 내 인생 아닌 것 없다.
내 삶을 이끌고 나는 오늘도 쓰고 읽고 말한다. 내 삶을 나와 남에게 유익하게 쓰고 싶다. 그래서 이 인생성형 마당을 쓸고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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